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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75
한자 趙重翊
영어공식명칭 Jo Jungik
이칭/별칭 보여,화농거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현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조중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2년 - 조중익 영희전 참봉, 현릉 참봉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조중익 영희전령, 영희전 참봉, 홍릉 참봉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7년 - 조중익 시강원 시종관, 현릉영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0년 - 조중익 진위군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조중익 부안군수, 흥해군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조중익 합천군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조중익 제천군수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44년연표보기 - 조중익 사망
묘소|단소 조중익 묘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양주
대표 관직 시강원 시종관|진위군수|부안군수|합천군수|제천군수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활동한 문신.

[가계]

조중익(趙重翊)의 본관은 양주(楊州), 초명은 중욱(重旭), 자는 보여(輔汝), 호는 화농거사(華農居士)이다. 아버지는 조정희(趙定熙)이며, 1871년에 태어났다. 부인은 파평 윤씨와 곡성 임씨이다.

[활동 사항]

조중익은 어린 시절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였으며,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1891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892년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내각주사(內閣主事) 6등으로 임명받았으며, 영희전령(永禧殿令)·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홍릉 참봉(弘陵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11월 시강원 시종관(侍講院侍從官), 12월에 현릉영(顯陵令)이 되었다.

1899년 현릉에 올리는 제물인 약과, 황률(黃栗), 대조(大棗), 백미(白米), 점미(粘米), 태(太), 맥말(麥末), 진유(眞油), 저주지(楮注紙) 등 9종(種)을 잃어버렸다. 이로 인해 참봉 이원용(李源鎔)과 함께 탄핵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를 사면받고 탁지부(度支部) 주사에 재직하였다. 그 후 1900년에 진위군수(振威郡守), 1902년에 부안군수(扶安郡守)와 흥해군수(興海郡守), 1905년에 합천군수(陜川郡守), 1907년에 제천군수(堤川郡守)로 임명되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여러 지방관들이 의병을 피해 도망가기도 하였는데, 제천군수였던 조중익은 의병을 소탕하였다. 순종의 즉위 후 조중익은 자원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과 저술]

조중익의 저술로는 『화농일기(華農日記)』가 있다. 『화농일기』에는 한때 친일 논란에 휩싸여 비난도 받았지만, 강직한 성품으로 풍란을 헤쳐갈 수 있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묘소]

조중익의 묘는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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