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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70
한자 鄭興敎
영어공식명칭 Jeong Heunggyo
이칭/별칭 정흥룡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다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8월 2일연표보기 - 정흥교 출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3·1운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정흥교 북면 만세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5년 1월 2일연표보기 - 정흥교 사망
출생지 정흥교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79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정흥교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79 지도보기
활동지 정흥교 북면 만세시위 참여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북면 만세시위 주도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정흥교(鄭興敎)[1900~1965]의 본적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79이다. 이명은 정흥룡(鄭興龍)이다.

[활동 사항]

가평읍에서 사숙을 운영했던 이규봉(李圭鳳)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에 참여했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휴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3월 14일 정흥교이규봉의 아들 이윤석(李胤錫)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보고, 가평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것으로 결심한다. 이윤석의 집에서 거사에 대해서 상의한 후 비밀리에 ‘밀통(密通)’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목동리, 소법리, 화악리에 각각 1매씩을 배부하도록 하였다. 배부한 문서에는 ‘세계만국공회에서 속국은 이번 독립하게 되었으니 우리 조선도 독립하게 되기 때문에 가평에 음력 2월 14일[양력 3월 15일] 아침 9시에 집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친다’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3월 15일 오전 9시 가평군 북면 목동리의 성황당에 군중 수 백명이 모이자 정흥교는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몰려갔다. 이 때 북면 이곡리, 군내면 마장리[현 가평읍 마장리]에서 가평군수와 헌병이 해산하라고 하였으나 정흥교는 ‘그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여기서 돌아가는 자는 조선인이 아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군중들을 격려하였다. 정흥교는 스스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다가 이윤석 등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헌병대 분견소로 연행되었다.

3월 16일 연행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지만 정흥교는 고등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흥교는 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정흥룡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 4. 26.)
  • 「정흥룡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7. 14.)
  • 「정흥룡 판결문」(고등법원, 1919. 9. 25.)
  • 『가평군지』(가평군사편찬위원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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