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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57
한자 鄭文緯
영어공식명칭 Jeong Munwi
이칭/별칭 경천,화남,화남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성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1년 10월 22일연표보기 - 정문위 출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895년 - 을미사변 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2월 - 정문위 보납산 전투 참여
몰년 시기/일시 1896년 3월 25일연표보기 - 정문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정문위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출생지 정문위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남종리 지도보기
활동지 정문위 의병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묘소 정문위 묘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남종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이충응 의병진 참여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정문위(鄭文緯)[1851~1896]의 본관은 경주, 자는 경천(敬天), 호는 화남(華南)·화남재(華南齋)이다. 정해종(鄭海宗)의 3남으로, 1851년 가평군 북면 남종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정문위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이충응(李忠應), 신재희(申在熹), 신경홍(申敬弘) 등이 가평에서 거의(擧義)하자 이에 동참하여 의병항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이충응을 중심으로 주로 야간에 관아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896년 2월 8일 이충응의 의병이 북면 소법리에 주둔하자 약 800명의 관군이 이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2월 12일 관군이 가평군 북면 일대를 수색하다가 의병 주둔지인 소법리 남종(楠淙)마을까지 접근하게 되자 정문위는 죽창을 들고 저항하다가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정문위의 죽음 이후 이충응 의병진은 가평읍 개곡리의 가일(可逸)마을에 주둔하여 훗날을 도모하였다.

1898년 6월 홍재화(洪在和)는 정문위의 죽음에 대하여 “창귀(倀鬼)들이 기꺼이 주인(主人)의 적국(敵國)을 위하여 창과 칼을 돌려대고, 못하는 짓이 없으니 일만 사람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거늘 공이 홀로 적(賊)을 꾸짖으며 굴하지 않다가 해(害)를 당하니 아! 아! 열열하구나. 그 훙혼(忠魂)과 의혼(毅魂)이 가히 당세 주인의 적괴(敵魁)들을 부끄러워 죽도록 하겠고, 가히 만세의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붙들었다 하겠으니 저 혹 창귀(倀鬼)에게 가만히 붙어 감히 공을 기롱하는 자들은 비록 개와 돼지라도 그놈의 고기는 먹기를 즐기지 않으리니, 아! 슬프다.”고 하여 정문위가 관군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싸웠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묘소]

정문위의 묘는 가평군 북면 남종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문위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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