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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18
한자 柳重岳
영어공식명칭 Yu Jungak
이칭/별칭 백현,항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김근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3년연표보기 - 유중악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유중악 사망
출생지 유중악 출생지 - 강원도 춘천시
거주|이주지 유중악 거주지 - 강원도 춘천시
묘소|단소 유중악 묘소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남성
본관 고흥

[정의]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학자.

[가계]

유중악(柳重岳)[1843~1909]의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백현(伯賢), 호는 항와(恒窩)이다. 아버지는 유호(柳晧)이며,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유중악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집안 형인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집안 조카인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이다. 스승이 이항로인데다가 친족들이 모두 이항로의 문인이므로 자연스럽게 화서학파(華西學派)에 속하였다. 평소 유인석, 유봉석(柳鳳錫), 이재영(李在永), 유경(柳暻), 김평묵 등과 교류를 자주하고 친분이 두터웠다고 전한다.

유중악은 성학(聖學)을 ‘널리 글을 배우는 것[박문(博文)]’과 ‘예법으로 요약하여 행하는 것[약례(約禮)]’의 두 가지로 파악하여 도학의 학문적·실천적 성격을 선명하게 확인하였다. 또한 바르고 공변된 ‘성현의 학문’인 유학과 사특하고 사사로운 노장, 불교, 기독교 등의 ‘이단’을 대립시켜 배타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장하였다. 이는 위정척사파로서 실천적인 행동을 많이 보여준 화서학파의 특징과 일치한다. 1893년에는 집안 형이자 스승이었던 유중교(柳重敎)가 사망하고, 이듬해인 1894년부터 유중악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유고를 교수, 편정하여 정고본(定稿本)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토적(討賊)을 하자며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이 때 유중악은 의병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병장 유인석을 가장 가까이서 뒷받침해 주었다. 정부가 의병을 불법화시켜 공격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자, 당시 정부 관료를 오랑캐와 같다며 비판하고, “의리에 옳지 않은 것은 임금의 명령이라도 구차스럽게 따를 수 없다”며 황제의 칭호, 광무(光武) 연호, 변복령 등을 거부하였다.

1900년에는 유중악이 춘천 구룡전(九龍田)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곳을 지나던 최익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친분을 쌓았다. 1905년 스승이었던 김평묵의 문집 『중암집(重菴集)』을 간행하는 데에 이근원(李根元)과 함께 김평묵의 문인인 홍종선(洪鍾善)에게 힘을 보탰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같은 해 8월, 유중악은 유홍석과 모의하여 춘천시 남면 가정리 항골[恒谷]마을에서 유영석(柳寧錫), 유봉석(柳鳳錫) 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일으켜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전투하였다. 하지만 2년 뒤인 1909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중악은 1907년에 유인석과 함께 『화동사합편(華東史合編)』을 간행하였다.

[묘소]

유중악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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