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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654
한자 趙秉徽
영어공식명칭 Cho Byeonghwi
이칭/별칭 한경(漢鏡),추담(秋潭),휘림(徽林),문정(文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현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08년연표보기 - 조병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27년 - 조병휘 생원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829년 - 조병휘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39년 - 조병휘 충청우도암행어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60년 - 조병휘 형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64년 - 조병휘 교정청 당상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0년 - 조병휘 예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1년 - 조병휘 공조 판서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74년연표보기 - 조병휘 사망
부임|활동지 충청우도 - 충청남도
묘소|단소 조병휘 묘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양주
대표 관직 예조 판서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조병휘(趙秉徽)[1808~1874]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자는 한경(漢鏡), 호는 추담(秋潭), 초명은 휘림(徽林),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조운규(趙雲逵), 할아버지는 조정현(趙廷鉉), 아버지는 조제만(趙濟晩)이다. 어머니는 홍경안(洪景顔)의 딸이며, 부인은 정기선(鄭基善)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병휘는 1827년(순조 2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828년 열린 왕세자 황감제(黃柑製)에서는 장원을 하여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였다. 1829년 정시 문과에서는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후 설서, 정언,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839년(헌종 5)에는 충청우도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使)로서 서산군수 등 11명의 지방관을 처벌하게 하였다. 1854년(철종 5) 대사성이 되었고, 1860년(철종 11)에는 이조 참판을 거쳐 형조 판서로 올라갔다. 1864년(고종 3)에는 교정청 당상관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70년(고종 7) 예조 판서를 지냈다. 예조 판서 재직 중에는 능침에 들어가는 수호군(守護軍)의 수를 줄여야 한다고 건의하여 윤허를 받아내었다. 이후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영의정 김병학(金炳學)과 함께 원(園)[세자, 세자빈, 세손, 왕의 생모의 묘]에 나가는 관리의 급수를 올리자고 주장하였다.

1871년(고종 8) 공조 판서로 임명받았고, 유사당상의 빈 자리에 행상호군(行上護軍) 자격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72년(고종 9) 상호도감(上號都監) 제조(提調)로 복무하였으며, 악장문제술관(樂章文製述官)으로도 활동하였다. 행예조 판서 자격으로 존호를 의정하는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홍문관 제학(提學)과 강관(講官) 및 예문관 제학을 거쳐 활동하다가, 1873년(고종 10)에 병을 앓고 있다며 체직을 청하였다.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만동묘(萬東廟) 철폐를 비난하고 국왕의 친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조병휘최익현이 신하의 본분을 망각하였으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최익현은 제주목에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가두는 것]되었다. 1874년(고종 11)에는 도총관으로 부임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사망하였고, 1878년(고종 15)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학문과 저술]

조병휘의 저서로 1864년에 교정청 당상관으로 재직하며 속간(續刊)한 『동문휘고(同文彙考)』가 있다. 『동문휘고』는 조선-청-일본 간의 외교 문서를 조선에서 모아 편찬한 것으로, 원편은 1788년(정조 12)에 완간되었다. 속편은 이후 1881년(고종 18)에 최종 완성되었다.

[묘소]

조병휘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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