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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620
한자 李時白
영어공식명칭 Lee Sibaek
이칭/별칭 돈시(敦詩),조암(釣巖),충익(忠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1년연표보기 - 이시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이시백,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오르고 연양군에 봉해짐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이시백 남한산성수어사·호위대장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이시백 공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8년 - 이시백 병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2년 - 이시백 진하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이시백 영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60년연표보기 - 이시백 사망
거주|이주지 이시백 낙향지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양주목 - 경기도 양주시
부임|활동지 강화유수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도
유배|이배지 여산군 - 전라북도 익산시
묘소|단소 이시백 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연안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 낙향한 문신.

[가계]

이시백(李時白)[1581~1660]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돈시(敦詩)이고, 호는 조암(釣巖)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기(李巙), 할아버지는 이정화(李廷華),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이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 張氏) 장민(張旻)의 딸이다. 동생은 이시방(李時昉)이다.

[활동 사항]

1623년(인조 1)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봉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연양군(延陽君)에도 봉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도 공을 세워 수원방어사가 되었다. 수원방어사로 재임 중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마를 이끌고 인조를 강화도로 인도하였다. 하지만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훈련도감 소속의 삼수병(三手兵)을 양성할 목적으로 징수하던 세미(稅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후 복귀하여 양주목사, 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남한산성 수어사와 호위대장을 겸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공조 판서로 승진하고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38년(인조 16) 병조 판서에 올랐는데, 척화신(斥和臣)이라는 이유로 심양(瀋陽)에 아들 이유(李愉)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서자를 대신 보냈고, 2년 뒤에 탄로나자 여산(礪山)[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중도부처(中途付處)[유형(流刑)의 일종으로 지정 장소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던 형벌]되었다.

1641년(인조 19) 복귀하여 총융사가 되었고, 1642년(인조 20)에는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44년(인조 22)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는데,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는 않았다. 이어 한성부 판윤과 형조 판서,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인조와 김자점(金自點) 등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소현세자의 아들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51년(효종 2) 김자점(金自點)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동생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기도 하였지만, 처벌받지는 않았다. 이후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55년(효종 6)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658년(효종 9)에는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1660년(현종 1) 사망하였다. 한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에 낙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묘소]

이시백의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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