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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72
한자 白海明
영어공식명칭 Baek Haemyeong
이칭/별칭 중회(重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현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684년 - 백해명, 허격·이제두와 함께 조종암에 글씨 새김
거주|이주지 백해명 은거지 - 경기도 가평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수원
대표 관직 증 공조참의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 은거한 문인.

[가계]

백해명(白海明)의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자는 중회(重晦)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을 지낸 백대기(白大琦)이다.

[활동 사항]

백해명은 1637년(인조 15)에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가평 산 속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후 허격(許格)[1607~1691], 이제두(李齊杜)[1626~1687] 등과 함께 대의(大義)를 익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향명배청(向明排淸)의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1684년(숙종 10)에는 허격, 이제두와 함께 임진왜란 때 명이 베푼 은혜와 청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뜻을 바위에 새겼는데, 이 바위를 조종암이라 한다. 조선 말기 학자 김평묵(金平黙)은 「조종암삼현전(朝宗巖三賢傳)」을 지으면서 세 사람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정인(李廷仁)이 지은 이 공의 행장을 읽었는데, 조종(朝宗)의 일은 이 공이 주로 이끌어 갔고, 허 공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 공이 기록한 비문에서는 허 공이 조종의 일을 주로 이끌어 갔고, 이 공은 그것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상국(相國) 신완송(申琓誦)과 남계(南溪) 박 공의 말에서는 백 공이 사당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두 공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왼쪽과 오른쪽에 칼을 차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내가 어디에서 알맞은 것을 취하겠는가?”

죽은 뒤에 공조 참의로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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