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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431
한자 蠶事
영어공식명칭 Sericulture
이칭/별칭 누에치기,양잠,잠사업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방문식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잠실을 설치하여 누에를 치던 일.

[연원 및 변천]

잠사(蠶事)[누에치기]는 고려 시대 이전부터 중국에서 전래되었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 보다 본격화되었다. 조선 시대 농업 정책의 기조는 ‘권농상(勸農桑)’이라고 표현할 만큼 양잠업(養蚕業)에 대한 국가의 관심이 높았다. 정부는 선농제(先農祭), 친경례(親耕禮) 등과 더불어 선잠제(先蠶祭)와 친잠례(親蠶禮)를 의례로 정비하여 정기적으로 거행하였다. 친잠례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일부 소홀해진 적도 있긴 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1939년까지 창덕궁 후원 주합루 좌측 서향각에 양잠소를 만들어 친잠례를 거행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궁궐 후원에 뽕나무를 심었는데, 현재 창덕궁에는 왕비가 아끼던 뽕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 47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조선 정부가 이처럼 양잠업을 중요시한 이유는 농경에 유리하지 않은 땅에 양잠을 함으로써 경제 기반의 일부를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양잠은 적은 노동력으로도 높은 생산성을 얻을 수 있었는데, 3~5월에 약 40일가량 집중적으로 노동력을 투입하면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 전기부터 권잠(勸蠶)을 위한 기관으로 잠실(蠶室)을 수도와 각 지방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415년(태종 15)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이적(李迹)을 양근[지금의 경기도 양평군]·가평 등지에 보내 양잠할 곳을 정하였다. 이어 1416년(태종 16) 2월 가평 조종(朝宗)[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상면]과 양근 미원(迷原)[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최초로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각각의 잠실에 여자 기술자 10명과 남녀 노비 각 10명씩을 소속시켰다. 조종과 미원 지역은 들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매우 무성하여 양잠에 적합한 곳이었다. 또 가평읍의 사이리(寺伊里)라는 곳에 뽕나무 2만여 주를 심고, 근방 고을의 관노비 50여 명을 동원하여 양잠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1417년(태종 17)에는 개성, 청풍[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의성, 태인[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등지에 도회잠실(都會蠶室)이 설치되었다. 이후 세종 대에 이르면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에도 설치되었다. 도회잠실이 설치된 지역은 전라도 태인 지역을 제외하면 척박한 지역이었다. 1결당 농업 인구수와 호당 평균 인구수가 비교적 높아 농업만으로는 경제 활동이 어려워 잠업이 병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의 잠실은 단종·세조 대에 수가 큰 폭으로 늘어났지만 그만큼 민가의 폐해도 심해졌다. 따라서 성종 대 이후 각 도에 1개의 지방 잠실만 운영하다가 성종 16년(1485)에는 잠정적으로 운영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중종 대에 사림파에 의한 향촌 안정책의 일환으로 잠실이 복원되었으며, 농상교서(農桑敎書)가 반포되기도 하였다. 동시에 양잠업은 사대부를 비롯한 향촌민들의 일반적인 부업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평균 60두(斗) 이상의 고치를 수확하여 일부는 장시 판매와 공물 방납을 위한 상품으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이후 양잠업은 단순히 공물(貢物) 생산이 아니라 상품 유통 경제의 일각으로 자리 잡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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